2009. 03. 28  pm 4 LG 아트센터

보리스 예이프만 발레단의 안나 카레리나를 보게된 건 순전히 이병훈 선생님 때문이었다. 발레를 예전부터 한번 보고 싶다, 보고 싶다 하긴 했어도 지금까지 단 한번도 발레 공연을 본적이 없었고, 그렇다 보니 발레 작품에 대해 아는 정보라고는 교과서에 나오는 정도나 가끔 신문과 잡지를 통해서 얻게 되는 그 정도였다. 그러니 보리스 예이프만이라는 사람이 얼마나 유명한지,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지도 제대로 모르고 있었다. 그런데 지난 겨울, 오랜만에 선생님을 만난 자리에서 선생님이 정말 좋아하는 안무가가 이번에 내한 공연을 한다면서 이 사람의 이야기를 했다. 선생님은 상트 뻬쩨르부르그에서 이미 보고 왔던 작품이라 보진 않으신다고도 했었지만. 하여간 그래서 집에 와서 엄마를 꼬드겨 3월 내한 공연을 예매를 했다.

그러나 온통 기대만발이었던 건 아니다. 발레는 물론이고, 난 사실 무용에 대해서라면 거의 문외한이다. 무용은 중학교 때인가 고등학교 때인가 수행 평가로 감상문을 쓰기 위해서 이대에 현대 무용 공연을 보러간 적이 있었는데 몸의 아름다움이나 표현력은 고사하고 음악과 동작의 난해함에 질려버린 기억만 있다. 그 이후에 본 무용이라고는 고작 채플시간의 무용 채플이 전부였다. 그러니 무용이라는 것이 과연 얼마만큼의 감흥을 불러 일으켜 줄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걱정도 있었다. 이 작품은 안나 카레리나라는 소설을 기반으로 하고 있으니 이대에서 보았던 그 현대 무용 처럼 당췌 무슨 이야기를 하고자 하는 것인지를 모를까봐 걱정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과연 대사 없이 몸으로만 전달하는 그 의미가 와닿을지는 확신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또 하나의 문제는, 내가 안나 카레리나 라는 작품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실 톨스토이라는 작가가 나랑 별로 안맏는다고도 할 수 있을텐데, 부활도 상당히 힘들게 읽은 데다가 안나 카레리나는 사실 정말 고생고생 1권만 읽고 그만둬버렸다. 그 후 모 조사에서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문학 1위로 안나 카레리나가 꼽힌 것을 보고 경악을 금치 못한 적도 있는데, 하여간 나로서는 안나 카레리나가 참 와닿지 않았던 작품이라서 이 작품이 좀 걱정스러웠다. 보리스 예이프만의 작품 중에는 내가 정말 사랑해마지 않는 카라마조프의 형제들도 있는데 이번에 내한한 작품이 카라마조프가 아니라 안나 카레리나 인것이 좀 아쉬웠었다.

그러나 이러한 우려들을 모두 제치고, 단적으로 말하자면 공연은 정말 근사했다. 모두가 무용에 대해서 언급할 때 사람의 몸이 가진 경이로움에 대해 찬사한다. 전의 현대무용 공연에서 나는 그것에 대해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다. 내가 절대로 할 수 없는 동작을 해내는 무용수를 앞에 두고도 무대에서 브레이크 댄스를 추는 댄스 가수들의 동작에 보내는 환성보다도 더 큰 감탄을 보내지 못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확실히 달랐다. '말' 은 한마디도 없이 '몸'으로만 표현되는 서사와 감정들은 또렷하게 와 닿았고 완전하게 몰입되었다. 안나 카레리나 원작은 상당히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지만 여기서는 과감하게 축소하여 카레닌과 안나, 그리고 브론스키 간의 사랑, 욕망, 배신, 변심 그리고 절망과 좌절의 감정들을 육체에 실어 무대 위에 풀어놓았다. 그리고 정말 한 순간도 눈을 떼기 어려울 만큼 무대 위에 풀어놓은 감정의 색채는 짙었다.

말이 없다는 것은 오히려 집중력을 높이는 데 도움을 주었다. 사람이 얼마나 시각적인 동물인가를 확인시켜줬다. 나풀거리는 옷자락, 길고 우아한 무용수들의 몸, 아름답게 움직이는 팔과 다리. 놀라울 만큼 매력적이었고 나는 완전히 매료되었다. 2막이 특히나 근사했다. 안나와 브론스키 간의 격정, 그리고 사람들로 부터의 차가운 멸시와 배척, 고통과 이별, 그로인한 한나의 좌절과 약물 중독에 빠진 그녀가 무시무시한 환각 속을 헤메고, 그리고 끝내 기차로 몸을 던지게 되는 엔딩에 이르기까지 긴장감이 팽팽하게 유지되어 숨돌릴 틈이 없을 지경이었다. 특히 환각에 빠진 안나의 장면은 기괴하였고, 또한 그래서 아름다웠다.

거의 10등신은 되어 보이는 무용수들의 아름다운 육체나 그들이 가진 빼어난 기량도 물론 감탄할 만 했지만, 군무와 독무를 엮어 서사와 감정을 표현해 내는 안무에 박수를 보내지 않을 수 없었다. 또한 그 안무와 더불어 음악. 이 작품에 쓰인 음악은 차이코프스키의 작품인데, 차이코프스키는 '안나 카레리나'라는 발레곡을 작곡하지는 않았다. 대신 차이코프스키가 작곡한 '현을 위한 세레나데',교항곡 '비창', 환상서곡 '햄릿'등을 모아 '안나 카레리나' 라는 발레 음악으로 엮은 것이 이 공연에 쓰인 발레곡의 정체였다. 그러나 보는 내내 단 한번도 위화감을 느끼지 않았다. 이 점에도 정말 무한한 찬사를 보내고 싶다. 차이코프스키의 진중한 음악들이 안나 카레리나와 어찌나 잘 어우러지던지. 보리스 예이프만을 두고 천재라고 칭찬을 자자하게 하시던 선생님의 말을 확실하게 이해했다.

브라보! 두근거릴 만큼 근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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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제이(J)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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