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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7/09/30 버마 정치 상황

버마는 1886 2월에 영국에게 정복당했다. 그러다 제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버마 내에서 독립 요구가 빗발치기 시작했고 이 시기에 아웅산이 민족지도자로 급부상하였다. 아웅산은 영국으로부터의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 일본의 힘을 빌리기로 결심하고 네윈 등 애국지사 젊은이 30명을 이끌고 일본으로 탈출하여 군사교육을 받기도 했다. 아웅산은 1942년 일본이 버마에 침입한 후, 그 이듬해 설립된 독립버마 정부의 국방대신자리에 올랐다. 그러나 그것은 아웅산이 기대했던 버마의 완전한 자주와 독립이 아니었다. 이에 아웅산은 제국주의와 파시스트 자체에 반대하는 반파시스트인민자유동맹 (AFPFL) 비밀리에 결성하고 힘을 모았다. 1945년 아웅산은 본격적으로 일본에 대한 저항활동을 시작했고, 이 해 영국이 버마를 재점령했다.

 
버마를 재점령한 영국은 백서 제안을 통해 3년간의 후견기간 후 버마의 독립을 허용하겠다는 입장을 발표하였으나, AFPFL은 이를 강력하게 반대하였다. 영국은 결국 1946년 이들과 독립협상을 벌이게 된다. 이 때 영국은 버마의 소수민족들이 그들의 원하는 바를 AFPFL과 협상하도록 했다. 당시, 까렌 족의 한 변호사가 작성한 문건을 보면 버마와 자신들을 전혀 다른 민족으로 구분하고 있으며 주변 소수민족도 함께 살 수 있는 민족과 그럴 수 없는 민족을 구분하고 있다. 그러나 이렇게 확고한 독립과 자치 의지에도 불구하고 버마 내 소수민족들은 그들이 원하는 독립을 이끌어 낼만한 역량이 부재했다. 그러나 이 이후 소수민족의 분리요구는 지금까지 끊이지 않고 계속 이어지고 있다. 버마의 소수민족도 그렇고 이라크를 비롯한 지역의 쿠르드 족 문제에서도 보듯 한 국가 내의 소수민족 문제는 짙은 피비린내의 원인이 된다. 분리를 요구하는 쪽의 입장도 절박하며 이 요구를 결코 수용할 수 없는 쪽의 입장도 단호하다. 그래서 소수민족 문제는 거의 대부분 폭력사태를 부르고야 마는 것이다. 서로간의 양보와 합의로 이루어지는 광범위한 자치권 허용과 같은 해결책은 도입될 수 없는 것인지, 깊은 숙고가 필요하다.


      이 때 소수민족 이외에 내부적으로 또 문제가 된 것이 바로 공산주의자들이었다. AFPFL은 다양한 정치적, 종교적 이념의 혼합체였다. 그런데 그들을 하나로 뭉치게 한 이유였던 독립 가시화되자 그들 사이에서 이념적 분쟁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던 것이다. 사회주의자였던 아웅산은 결국 공산주의자들을 축출했다. 이런 내부적 문제가 이어지던 1947년 1월 27 버마의 독립협상이 타결되었고 이어 4월에 실시된 총선거에서 AFPFL이 압승을 거두고 공산주의자들은 3석을 차지하는데 그쳤다. 아웅산은 영연방에서 탈퇴한 독립적인 공화국을 선언했다. 그런데 그 해 7 19일 좌파 정치인들을 규합해 아웅산에게 대항하던 우소에 의해 아웅산과 타낀 먀, 샨족 대표등은 회의 중에 저격으로 살해당한다.

당시 영국정부가 이 일에 개입되었다는 의혹이 제기되며 사회가 혼란에 빠질 조짐이 보였으나 영국총독이 재빨리 개입하여 당시 행운으로 저격을 피했던 타낀 누가 새로운 반파시트연맹을 구성하도록 하고 10 17일 버마연합공화국을 완전히 독립적인 주권을 가진 국가로 인정한다고 발표했다. 그리고 타낀 누가 우누라는 이름으로 초대 수상에 취임했다. 1948년 이후로도 버마는 공산주의자들과 점진적 사회변혁을 추구하는 사회주의자들, 그리고 소수민족 분리주의자들 간의 다툼으로 시끄러웠다. 우누는 불교를 분열된 사회의 구심점으로 삼으려 했다. 그는 불교와 결합된 독특한 불교식 사회주의를 내걸고 복지국가 건설을 슬로건으로 내세웠으나 분열된 정국 안정을 도모하기에는 그 역량이 부족했다. 결국 1958년 우누는 네윈에게 치안회복과 공정한 선거를 목적으로 하는 선거관리내각수립을 제안하고 네윈을 이를 받아들였다. 1958 10월부터 1960 3월까지 네윈의 과도내각이 정국을 담당하여 치안의 안정을 도모했고 1960 2월 상.하원 선거가 다시 실시되었고 우누는 압도적인 지지로 재집권에 성공했다. 그러나 여전히 내정은 혼란했고, 1961년 소수민족들의 극성스러운 분리독립운동에 우누가 그들의 자치권을 광범위하게 허용할 움직임을 보이자 국가 분열을 우려한 군부가 강력 반발하였다.



      
결국 1962년 3월 2 네윈 휘하 버마군은 군사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장악했다. 건국영웅인 네윈은 아웅산이 사망한 이후 정치참여를 하지 않겠다고 선언했고, 우누의 제안을 받아 들여 과도정부를 구성한 이후 총선 결과에 깨끗이 승복할 때까지만 해도 그의 선언이 빛을 바래지는 않았으나 결국 군사쿠데타를 일으켜 군사독재를 시행함으로써 모든 것을 무너뜨렸다. 그는 비록 1988년 민주화 운동으로 실권을 잃었으나 그가 세운 이 군사정권은 지금도 버마를 지배하고 있는 것이다. 네윈은 우누의 불교식 사회주의를 철폐하고 새로이 버마식 사회주의를 국가의 이념으로 내걸었다. 국회와 고등법원 모든 정당을 해산하고 버마사회주의 계획당을 창당해 일당체제를 수립하여 정권을 장악하였고 외국인들을 배척하고 그들이 소유하던 재산을 몰수, 기업들을 국유화하여 자립경제를 도모하였으나 사회주의적 경제의 병폐인 생산의욕감퇴와 폐쇄경제로 인한 활력감소로 경제의 근간이 오히려 뒤흔들렸다. 결국 1976년 외자도입을 통한 경제개발을 추진하였으나 이는 근본적인 사회경제적 구조를 개혁한 것이 아니라 외채의 부담만을 늘린 결과를 초래하여 80년대 초 기어이 외환보유고가 바닥을 드러내게 되었다. 경제는 계속 악화일로를 걸었고 1974년 중부 미얀마 차욱 지역의 석유근로자들의 시위를 비롯한 반정부 시위들이 연이어 벌어지자 결국 1981년 네윈은 대통령직을 사임한다. 그러나 당의장직은 계속 보유하였고 실질적인 권력에서 물러난 것은 아니었다. 이후에도 경제는 계속 내리막길을 걸어 1987 UN이 버마를 세계 최빈국의 하나로 지정하는 사태까지 벌어지자 버마국민들의 반정부 감정이 격화되었다.



       1988
, 찻집에서 시작된 학생들의 시비는 경찰의 과잉진압과 이러한 국민들의 반정 감정이 맞물려 그 해를 휩쓴 대대적인 민주화 운동을 낳았다. 3월 시작된 시위는 군의 강력대응으로 진압되었으나 6월 에 시위는 다시 시작되었다. 소요가 쉽사리 가라앉지 않자 결국 버마사회주의계획당은 7 23일 당의장 네윈의 사임을 발표하고 9월 말경에 다당제도입여부에 관한 국민투표를 실시하겠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그들이 권력을 포기하려는 마음을 먹은 것은 아니었다. 네윈의 후임자로 시위대 과잉 진압에 앞장섰던 랭군의 도살자세인 르윈을 당의장에 임명하였고 그는 다당제 투표를 거부하여 무산시켜버린다. 시위대는 거세게 항의했고 결국 그는 17만에 사임하고 만다. 그리고 19일 쿠데타 이후 최초의 민간인 출신 당의장 마웅 마웅이 임명되어 유화정책을 피면서 국민의 마음을 달래고자 하였다. 그러나 시위대는 민주화를 요구하며 격렬한 시위를 멈추지 않았고 이즈음 시위의 양상은 경찰서를 습격하여 무기를 탈취하는 등의 무장투쟁 양상마저 보이기 시작했다.


       결국 버마사회주의계획당은 부랴부랴 9 10일 다당제 총선을 실시하겠다고 발표했다. 민주화는 수 많은 시신들을 제물로 이제 눈 앞에 온 듯 하였으나 소위 권력의 맛이라는 것의 무서움은 여기에서도 십분 그 역량을 발휘했다. 네윈 역시 그에 이끌려 정치 참여를 하지 않겠다던 약속을 버렸고 그와 함께 오랜 세월 권력을 핥아온 군부 역시 권력을 잃고자 하지 않았다. 9 18일 소 마웅 국방장관이 친위쿠데타를 일으켜 국가법질서회복위원회로서 전권을 장악해버린 것이다. 9 25일 소 마웅은 사회주의를 포기한다고 선언하고 버마사회주의계획당을 민족연합당으로 개명하였다. 그들은 질서만 회복되면 민정이양을 하겠다고 공언하였다
.


         1949
2월 소 마웅은 1년 후 총선을 실시한다고 공포했고 그 해 6 18일 버마를 미얀마 연방국으로 개칭하였다. 1988년 버마 최초의 공식적 야당으로 등록한 민족민주연합당은 지도자 아웅산 수지가 감금되는 등의 군사정부의 탄압에도 불구하고 1990년 총선에서 유효표의 59.87%를 차지하는 기염을 토했다. 그러나 국가법질서회복위원회는 민정이양을 거부하고 국가내란죄를 적용하여 민족민주연합당 소속 의원 등을 체포하는 등 폭정을 펼쳤다. 그리고 지금도 이들은 여전히 군부독재를 지속하고 있다
.


                                                                                                                     -작성일 2005년 가을

2005년 가을 정치와 영화 수업을 들으면서 조사했던 자료이고, 블로그에는 작년 가을에 올렸다. 그리고 2007년 가을, 버마에서는 다시 한번 민주화를 위한 시위가 벌어지고 있다. 군부의 유혈 진압으로 다소 소강상태에 접어들었다고는 하나, 많은 이들은 여전히 지난 88년의 실패를 극복하고 버마에서 군정이 막을 내리기를 기원하고 있다. 불행하게도 폭력이 반드시 패배할 것이라고는 말할 수 없다. 그러나 폭력은 반드시 패배할 것이라는 믿음과 의지를 가질 때, 비로소 작은 희망이라도 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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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제이(J)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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