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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8/11/17 대왕세종 (패러디 '안해')


아름답다.

왕은 물에 적신 수건으로 이불 밖으로 내민 왕비의 손을 찬찬히 닦았다. 가냘픈 흰 손이 야윌 대로 야위어 뼈마디가 모두 툭툭 불거져 나와 있다. 손이 어린아이처럼 한 줌이다. 손을 닦아주다가, 멈추고 왕은 손을 들어 얼굴을 쓸어본다. 원래 작았던 얼굴이 정말 주먹만큼 조그맣게 줄어들었다. 손 끝에 가느다란 왕비의 뼈가 만져졌다. 숨을 쉬는 대로, 뺨이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게 느껴졌다. 아직 숨을 쉬고 있다.

아름답다.

가까이 얼굴을 가져다댔다. 얼굴을 아주 가깝게 다가가자 흐릿한 시야에 왕비의 얼굴이 조금은 또렷하게 보였다. 머리는 하얗게 세었지만, 얼굴에 주름도 늘었지만, 점점 조그맣게 줄면서 머리도 검어지고, 얼굴도 도로 펴지는 것만 같았다. 마치 처음 만났던 혼례복에 폭 쌓인 볼이 발그레하던 소녀로 돌아가는 것 같다. 왕은 미소 지었다.

이러는 게 어디 있습니까, 부인.
나는 이렇게 할애비로 늙고 추한 모습 그대로 인데, 당신은 도로 소녀처럼 고와지는군요.
이리 고와져서......어디를.........

".................뭐....하고...계십니까?......"

왕비가 어느새 눈을 떠서 말갛게 개인 눈으로 왕을 올려다보며 물었다. 눈동자가 개울물처럼 깨끗하고 맑아서 아픈 사람이라고는 믿겨지지 않을 정도였다. 왕은 여전히 이 현실을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왕비가 병을 얻어 누운지 벌써 이레가 지났다. 어의는 첫 진맥을 마치자마자 고개를 저었다.

'.......기력이 너무 많이 쇠하셨습니다. 가슴 속 화가 더는 탕약으로도 시침으로도 다스릴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나이다.......'

왕은 납득할 수 없었다.

'그럴리 없다. 진맥을 다시 해. 아니다. 중전을 낫게 할 방도를 찾아. 찾아내. 찾아내지 못하면 그대의 목숨은 없다.'

그러나 누가 봐도 확연할 정도로 왕비의 숨은 하루가 다르게 약해지고 있었다. 왕비가 자리에 누운 지 이틀이 지났으나 상태는 더욱 나빠지기만 했다. 자꾸만 정신을 놓았고, 그 시간도 길어만 졌다. 왕비가 쓰러진 이후 입궐해 내내 그 머리맡을 지키고 있던 정의가 어렵게 말을 꺼냈다.

'어마마마께서는....궐을 늘 무겁다, 하시었습니다. 그러니.......'
'.....어디로.....뫼시었으면 하느냐.....'
'......수양의 사가로......뫼시는 것이 어떠한지요.....'
'....세자와 더불어 너희끼리는 이야기가 끝난 것이냐...'
'......예, 아바마마.'

왕은 이불 아래로 왕비의 손을 꼭 잡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궐이 무겁다라.

작고 마른 왕비의 어깨가 떠올랐다. 그 어깨 위에 놓인 이 궐의 무게가 버겁기는...참으로 버거웠겠지요.

수양의 사가로 거처를 옮긴 날, 왕비는 그 어느 때보다도 맑은 얼굴이었다. 그것이 기뻐, 왕은 왕비의 방을 한시도 떠나지 않고 지켰다.

'좋으십니까?'
'.....좋습니다.......이리 사가에 마주 앉아있으니 마치.....대군저 시절로 돌아간 것 같군요....'

왕비는 그렇게 말하며, 정말 군부인이던 때처럼 환하게 웃었다. 왕은 아련하게 그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리 웃는 걸 본지가 얼마만이던가. 광평대군에 이어, 두해 전, 평원대군 마저 요절한 이후, 왕비는 웃음을 잃었다. 그 얼굴에 웃음을 되찾아주려고 왕은 무던히도 애썼으나, 왕비는 그저 쓸쓸한 미소만 지을 뿐 예전처럼 꽃같이 환하고 달처럼 고운 웃음을 보여주지는 않았다.

그것이 이토록 단순한 방법으로 얻을 수 있는 걸 줄이야.....

궐이 그토록이나 무거우셨습니까?

'.........건강해지기만 하세요. 부인께서 건강해만 지신다면.......내 세자에게 양위를 하고, 부인과 함께 궐을 떠나 살겠습니다.'
'..............마음에도 없는 소리 잘두 하십니다.'

왕비는 밉지 않게 눈을 흘기며 왕에게 핀잔을 주었다. 그러나 왕은 정색을 하고 다시 말했다.

'마음에도 없는 소리 아닙니다. 지금까지도 세자는 잘 해냈습니다. 그러니 이제 믿고 맡겨도 됩니다.'
'.......세자를 못믿어서 그러는 것이 아닙니다. 전하를 못믿는 것이지요.'
'부인....'
'........전하께서는..........저의 낭군으로만 사실 수 있는 분이 아니십니다........아직도 하고자 하시는 일이 많으시지 않습니까......그걸 모두 세자에게 양보하시고 사실 수 있겠습니까?....'
'...그......그건.'

말문이 막힌 왕을 앞에 두고, 왕비는 소리 내어 웃었다.

'.....거짓말을 못하시는 건 여전하십니다......'
'.....부인 앞에서만 그렇습니다.'
'.....듣기 좋은 소리군요.'

마주 웃으며, 왕은 이제 왕비가 고비를 넘겼다고 믿었다. 그러나 그것은 꺼지기 전 불이 잠깐 빛을 발하는 것과 마찬가지의 일이었을 뿐이다. 왕비는 다시 정신을 잃었고, 어제부터 오늘까지 꼬박 하루 반을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왕은 가슴을 치며 후회했다.

'아바마마. 가서 좀 쉬시는 게 어떠십니까?'

수양의 사가에서도 하루 종일 왕비의 수발을 들던 정의가 걱정스레 왕에게 권했으나 왕은 고개를 저었다. 왕은, 제 어미를 꼭 닮은 딸의 얼굴을 찬찬히 살피며 옛 이야기를 꺼냈다.

'네 어머니가.......네 언니를 가졌을 때 말이다.......나는 참 무심했다. 아이를 가진 내자에게 뭘 살펴주어야 하는 줄도 모르고 밖으로만 나돌았지. 어느날인가, 자치가 말을 끌고 저자로 나를 데리고 갔다. 그러더니 사과 한바구니를 사서 안기더구나. 아이를 가지면, 그런 것을 먹고 싶어하는 법이라고. 나는 그런 걸 그때 처음 알았다. 그걸 들고......네 어머니께 가서 드렸는데....내가 그만, 그게 내가 고른 것이 아니라 자치가 고른 것이라고 말해버렸지.'
'.......아바마마 다우십니다.'
'.......늘 괜찮다, 좋다, 그러던 네 어머니가 그때만큼은 무척이나 서운한 얼굴로 내게 너무한다고, 거짓이라도 좋으니, 내가 마음을 담아 골랐노라 말해주었다면 좋았을 거라...그렇게 말했다.'
'.......그러셨습니까.....'
'그랬지......어쩐지 오늘.......그날 일이 많이 미안하구나......'

어디, 미안한 일이 그때뿐일까. 그날도, 거짓이라도 이제는 나도 다 되었으니, 남은 세월이라도 그대의 낭군으로만 살겠노라 그리 말해주었다면 좋았을 것을.

"..........지금이...몇시 입니까?......."
".........해시.....입니다...."
"......밤이 늦었군요.......피곤해보이십니다."
"....괜찮습니다."
"........가서......쉬셔야.....하는 게 아닙니까.....?"
".......왜 이리 어리석습니까!"

어쩐지 와락 화가 치밀었다. 자기 목숨이 경각에 달린 이 순간에도, 평생 맘 고생만 하게 한 낭군의 얼굴색이나 살피고 있는 내자의 마음이 참을 수 없을 만큼 갑갑하고 답답하게 느껴졌다. 그래서, 저도 모르게 왕은 소리를 높이고 말았다. 앗차 싶었으나, 이미 흘러나간 말은 되감을 수 없고, 놀란 왕비의 눈이 동그래졌다.

"...저...전하....."
".............지금은 부인 생각만 하세요. 지금은...지금 이 순간만은, 나도, 아이들도 모두 놓아두고 부인 생각만 하세요.'
"......전하......"
"차라리 뭘 해달라, 이게 불편하다, 불평하고 화를 내고 투정을 하세요."
"..............불평할 게...없어 그런 것을요....."
"..........늘 그런 식이라, 늘 그렇게 참고 인내하며 살아......결국 이리 눕고 만게 아닙니까?"
"......전하께서 누구에게 참는 것에 대해...화를 내실 입장이십니까?"
"......부인......."
"....저를 좀 일으켜주시렵니까?"

왕비가 손을 뻗었다. 왕은, 어서 그 손을 잡아 왕비의 조그마한 몸을 일으켰다. 왕비는 이레 전보다도 훨씬 더 마르고 조그마해졌다. 이제 곧 어린아이로 돌아갈 것만 같다. 그러다가 숫제, 먼지처럼, 아니 나비처럼 훨훨 품에서 날아갈 것 같아, 왕은 품에 왕비를 가깝게 안았다. 다시는 놓아주지 않을 것 처럼.

".........참으로 이상도 하지요......"
"뭐가 말입니까?"
".......고되고 어렵고 힘겨운 삶이었다고 생각했습니다......늘 참아내고, 견디며 살아온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이제와 돌아보니 말이지요.....참........좋은 삶이었습니다....."
"..............좋기는......뭐가...좋습니까........"
"...........전하께.....한 가지 묻고 싶은 게 있습니다."
".....뭡니까?...."
"........제가......전하께.........나쁘지 않은 위안이었습니까?"

왕은 순하게 물어오는 왕비의 물음에 말문이 막혔다. 나쁘지 않은 위안이었냐니. 왕은 입술을 깨물며, 왕비의 몸을 더욱 꼭 안아, 왕비의 머리를 뺨 가까이 가져다댔다.

"...........부인은.....내게.........세상에 꼭 하나 뿐인 평안이었습니다....."

그 말에, 왕비는 세상에 다시없을 만큼, 아름답게 미소 지었다. 그 어느 때보다도, 대군저의 뜰에서도, 궐의 무거운 처마아래서도, 단 한번도 본 적 없는 눈부시게 아름다운 미소였다. 왕의 가슴이 먹먹하게 차올랐다. 왕은 알았다. 이 사람은, 떠날 채비를 하는 것이다. 부질없이, 왕비의 마른 몸을 꼭 끌어안았으나, 그것으로는 막을 수 없다는 것 역시 이미 알고 있었다. 왕비는 왕의 손 등 위에 제 손을 천천히 올려놓았다. 왕은 넘쳐흐를 것 같은 눈물을 겨우 눌러참았다. 아직은.......나는....그대를 보낼 수가 없습니다.

".......그거면 충분합니다."
".....부인....그런 말 마세요........부인이 충분할지 몰라도, 나는 아닙니다. 부인은.......부인은.......내게 세상에 꼭 하나 뿐인 평안이었으나......나는 부인께 그렇게 해주지 못했습니다......그러니...충분하다는 말씀은 마세요...."
"....전하."
".......아주 오래 전, 우리가 초야를 치루 던 날 밤, 내가 그대에게 훗날 꼭 묻고 싶은 것이 있으니.......도망가지 말고 내 곁을 지켜달라 했던 걸 기억하십니까?"
".....기억...하구 말구요."
"......나는 아직 묻지 못했습니다....그러니 좀 더 내 곁
을 지켜주세요..."
".........그렇군요.....아직......그 질문을 듣지 못했군요....."
"....그래요. 그러니.....아직 내게 시간을 더 주셔야 합니다."

왕비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눈을 천천히 감았다.

"부인?"
"....조금 피곤하군요........조금 자고 일어나야겠습니다."
"....그러시겠습니까?"
"..........네에.....계속 곁에 있어주시겠습니까....?"
".......물론입니다....눈을 뜨실때까지....곁에 있겠습니다."
"....네에.....조금....있다가......뵈어요......"

왕비의 목소리가, 서서히 줄어들었다. 왕은 왕비를 자리 위에 눕히지 않고 자기 무릎 위에 눕혔다. 그리고 어린아이를 다루는 것처럼, 토닥토닥 그 어깨를 두드렸다.

".....조금만 자고 일어나요........일어나서....따뜻한 차를 한잔 마십시다......"

그리고 당신 몸이 좋아지면.....온행을 갑시다. 그리고 또.........
또 세월이 더 지나고 나면.......내가 그때는 그대에게 물어볼 수가 있겠지요....

나도......그대에게.......충분한 위로가 되었습니까?........

그때는......그대도 웃으며 내게 대답해줄 수 있을 겁니다.

네.........

그러니.....조금만 자고 일어나는 겁니다, 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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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왕세종 끝났다. 시청률은 시원치 않았고 이래저래 말도 좀 있었고, 막판에는 표절시비에 종종 나도 흠칫하게 하는 무리수 설정들이 있었지만, 이 드라마는 결국 참, 좋았다.

눈이 멀어가는 왕은 마지막 원이었던 한글창제에 매달리고 끝내 원은 이루나, 눈은 거의 실명상태가 되버린다. 낭군이 눈 멀고 암흑 속에서 살아갈 일을 눈물 흘리며 안쓰러워하던 왕비, 늘 곁을 지키며 왕이 소홀히한 세세한 일들을 챙기며 살던 왕비는, 쇠약해진 왕보다도 먼저 갔다. 드라마에서 소헌의 죽음은 직접적으로는 다루어지지 않았다.

미리보기에, 떠나는 최만리 이야기 다음으로 바로, 왕비의 죽음이 아니라 명의 칙사가 와 왕비의 죽음을 조문했다는 항목이 나오길래, 왕비의 죽음이 그런 식으로 다루어질 것을 예상했다. 그러나 드라마가 다룬 소헌의 죽음이 나빴던 것은 아니었다. 명의 황제를 설득하기 위해 직접 삼천리 길을 가, 황제를 만난 소헌은 진양에서 수양으로 군호가 바뀐 아들 유와 함께 명과 조선의 국경선에 놓인 강가에서 대화를 나눈다.

네가 있어 좋았다고. 네가 어미의 곁을 살뜰히 지켜준 것 처럼, 아비의 곁도, 형의 곁도 지켜줄 수 있겠냐고. 아들은 약조를 한다. 그러나 후대의 사람들은 안다. 그 약조가 얼마나 처참하게 깨졌는지. 그 서늘하면서도 슬픈 장면 이후, 왕비는 말한다. 강물이 우쭐렁 우쭐렁 잘도 흐른다고. 내 마음은 이미 저 강을 건너, 내 나라에 가있는 것 같다고. 해는 내리쬐고, 왕비는 천천히 걷는다. 그 다음 장면은, 용상에 앉은 왕이었다. 왕은 이미 눈이 멀었다. 훈민정음을 새긴 활자를 손 끝으로 만져가던 왕의 손이 아래아, 아 자에 멈춘다. 아. 그리고 안해. 칙사는 왕비의 죽음에 조의를 표하고, 훈민정음에 대한 황제의 호의도 전한다. 의례가 시작된다는 상선의 말에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는 왕. 그가 떠난 자리에 남은 글자는 쓸쓸한 안해. 저 글자를 보는 순간, 마음이 울컥하면서 눈물이 핑돌았다.

설마, 대사 한줄로 처리하는 건 아니겠지 라고 어제는 벅벅거렸지만 막상 보고나니 찡했다. 직접적으로 다루지 않고, 저리 간접적으로 표현하는 것도 나쁘지는 않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아쉬운 것은 아쉬운 것. 그래서 결국 소헌의 마지막 가는 길을 써봤다. 왕비의 곁을 지키는 자식을 처음에는 수양으로 하려다가 (수양의 잠저에서 돌아가시니) 드라마에서 아역만 나오고 끝내 성인역은 나오지 못한 정의공주가  걸려서, 정의로 했다. 또 드라마에서 마지막 장면 왕은 거의 눈이 완전히 먼 것 같으나 여기서는 아직 시력이 다소 남아있는 것으로 했다. 왕비의 죽음 이후, 완전히 실명되었다는 설정이랄까.

드라마 끝난지 다섯시간이 넘었는데 여전히 마음이 먹먹하다. 드라마에 대한 후기도 좀 쓰고 싶은데, 워낙 방대한 양이기도 하고, 생각도 마음도 아직은 정리가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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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제이(J)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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