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율'에 해당되는 글 13건

  1. 2008/07/13 쓰릴미 (Thrill Me)의 '그', 리차드 로엡

(지금부터 앞으로 올해 쓰릴미와 작년을 비교해서 적는 이야기들을 단지 내 취향에 의한 것이다. 올해 연출이나 의도, 각색이 개인적으로 아쉽다는 것이지 틀렸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작년 쓰릴미 두 명의 그는 판이하게 달랐지만 '개자식' 이라는 점에서는 같았다. 그건 대본 자체가 '그'를 개자식으로 규정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작년 처음 쓰릴미를 봤을때 'Everybody wants Richard'에서 불장난은 안돼, 라고 말하는 '나'에게 너 나랑 같이 있고 싶던거 아니었어? 라고 비웃듯 말하는 '그'를 보고 완전 나쁜 자식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어, 여전히 불안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는 '나'에게 키스하며 '어때, 행복해?' 라고 묻는 얼굴을 보고 확신했다. 저 자식은 개 자식이다, 라고. 그러나 이 부분이 올해는 없어졌다. 그는 좋아, 니가 나랑 같이 있고 싶은게 아니라면, 하고 돌아선다. 내용이 달라진 건 아님에도 형식이 바뀌니 감정이 달라져버렸다. 키스씬은 아예 빠졌다. 또 나의 노래를 비웃으며 듣고 있던 '그'가 나의 애원에 마지못해 선심이라도 베푸는듯 생각 바꿨다, 오늘 너랑 같이 있을거야 라고 말했던 오만함은 나는 너의 숭배심만이 그리웠어,  그러나 계획을 바꿀 수도 있겠지 등등으로 설명이 길어지면서 약화되버렸다.

계약서 씬에서도 그렇다. 난 너 없어도 돼! 라고 외쳤던 당당함은, 그것이 진실이라기 보다는 허세에 가깝다. '나'가 결국 못하겠다고 고집을 부리자 계약서로 유혹하는 것만을 봐도 알 수 있다. 그러나 스스로의 약함, '나'에 대한 의지를 인정할 수 없는 오기가 드러나는 장면이었다. 그러나 아니 난 니가 필요해, 너 없으면 다 망쳐버릴거야, 됐냐? 라고 말하는 '그'는 자신이 뛰어난 인간, 초인이라고 믿는 자신만만함이 없었다. 대사를 차라리 네가 듣고 싶은 말이 이거냐? 라는 식으로 비꼬면서 쳤으면 좋았을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했다. 그 유명한 '바닥에 흘리지 마' 장면이 사라진 것도 '그'의 캐릭터를 평면화 시킨 중요한 요소다. '나' 보다는 제 방 바닥을 더 소중히 여길 만큼 제멋대로인데다가 이기적인 인간인 '그'의 성격을 명확하게 드러내던 장면이 사라지고 나니 '그'의 캐릭터가 초반에 명확하게 드러나기가 어려워졌다. 김동호씨의 연기나 노래가 문제가 아니라 캐릭터 해석력이 문제라는 생각을 하고 있지만, 이는 단지 김동호씨 본인의 문제만이라기 보다는 올해의 대본 자체가 '그'를 작년에 비해 훨씬 더 유한 인물로 만들고 있는데서 기인한다.

진정해/내안경 넘버에서도, 등에 있는 점이 안보이게 뒤집어 놓자고 했잖아 라고 절규하는 '나'에게 난 다 잊었어 알아? 라고 되려 버력 화를 내던 '그'는 올해는 내가 잊었다, 됐냐? 라고 자신의 실수를 인정해버린다. 'I'm trying to think' 에서도 내일 공원에서 만나자며 '나'를 두고 퇴장할때 표정이 싸늘하게 돌변하던 것도 올해는 사라졌다. 물론 '바닥에 흘리지마'를 제외하면, 원작 쓰릴미 대본에 더 가까운 형태로 번역된 것이 맞다. 그러나 극을 보면서 원작에 있는 대사를 모두 번역한다는 것이 꼭 좋은 것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오만방자하고 제멋대로인 성격을 빤빤하게 드러내며 '나'를 휘두를 뿐 아니라 관객까지 압도했던 설정들을 영문 대본 대로 돌리고서 새롭게 구성된 '그'가 얻은 것이 무엇인지를 모르겠다. 원작자인 돌기노프씨는 리차드가 네이슨을 사랑한다고 생각한다고 말한 바있다. 네이슨을 사랑하지 않는 것 처럼 굴고 있어도 네이슨에게 의지하는 자신또한 인정할 뿐더러 그걸 네이슨에게 직접 말하기까지 하는 원문 속 리차드는 네이슨과 자신이 맺은 특수한 관계를 인정한다. 그것이 어떤 방식이든 사랑으로 표현된다면, 네이슨이 리차드를 떠나지 못하는 이유는 분명해질 것이다.

그러나 올해 쓰릴미에서 김동호씨가 보여주는 '그'는 '나'를 사랑한다고 보기 힘들었다. 오히려 작년의 '그'들이 더 '나'를 사랑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김동호씨의 '그'는 '나'에게 의지하고 있음을 인정하고 있지만 그것은 애정을 띠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덕분에, '나'가 왜 '그'에게 목을 매는지 이해하는 것은 더 어려워졌다. '그'는 '나'를 전혀 사랑하고 있지 않은데다가 살인까지 불사할만큼 매력적인 존재도 아니고 허술하게 보인다. '그'는 '나'에 대한 의지를 인정하고 있지만 그것이 안쓰러워 '나'가 머문다고 보기에는 석연치가 않다. 오히려 허세와 오만방자의 극치를 보여주며, '나'에 대한 배려라고는 눈꼽만큼도 없어보이는 이율의 '그'가 더 안쓰러웠다. 무열씨의 '그'를 보고 나와서 노트에 짧은 감상을 기록하며 그 도도함과 아름다움에 왜 '나'가 그토록이나 '그'에게 극단적으로 몰두하는지 이해했다라고 적었다. 율군의 '그'는 무열씨의 '그' 처럼 유혹적이었던 것은 아니어도 어떤 의미에서는 '나'가 더욱 떠나기 어려운 인물이었고, 그래서 공원에서 '그'가 배신했을때, '나'를 더욱 처절한 배신감에 떨게 하는 인물이라고 생각했다. 이미 '나'가 '그'에게 매료된 이후, '나'와 '그'가 오랫동안 가깝게 지낸 동안 '그'에게 '나'가 절대적으로 필요한 인물이 되었다는 것을 '나' 또한 알고 있었다. '그'의 허세와 오만, '나'에 대한 냉담한 태도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를 떠나기 어려웠다. 그래서 숭배심과 동경으로 점철된 사랑이라기 보다는, 깊은 애정과 '그'를 애달파 하는 측은지심이 결합된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토록이나 강렬한 소유욕을 드러냈던 필석씨의 '나' 조차도, 협박편지 씬에서 우리 아버지는 단지 사회적인 시선에 신경을 쓸거라고 애써 무신경하게 말하는 율군의 '그'를 무척이나 안쓰럽게 바라봤다.

물론 김동호씨의 '그'에 대해서도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는 이유를 시시콜콜 따질 수는 없으니 그대로 받아들이면 그만이긴 하다. 그러나 아무래도 논리적인 설득력도 떨어지고 무엇보다 관객의 매료시키던 '그'의 캐릭터가 약화됨으로써 극의 재미는 줄어들어버렸다. 작년의 '그'들은 나를 필요로 하고, 나에게 의지하고 있을 지언정 결코 그를 드러내려고 하지 않았다. 어쩌면 본인 스스로도 그걸 인정하고 싶어하지 않는 캐릭터였다. 사실 '그'는 '나'가 필요하고, '나' 없으면 모든 것을 망쳐버릴 것이라는 것을 꼭 대사로 말해야만 관객들이 알게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가 나에게 의지하고 있다는 것이 훤하게 보임에도 자신은 결코 인정하지 않으려는 '그'의 허세와 오만이 'keep your deal with me'와 'afraid' 특히 'afraid'에서 그가 무너져내릴때 감정의 파고를 더욱 거세게 만들었다고 본다. 물론 올해에도 무열씨의 '그'는 여전히 빤빤한 유혹자겠지만 그래도 바뀐 설정들은 아쉽다.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
Creative Commons License
Posted by 제이(J)
이전버튼 1 2 3 4 5 ... 13 이전버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