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재홍'에 해당되는 글 1건

  1. 2009/10/01 어쌔신- 누구를 위한 자유인가? (4)

어쌔신

 

2009. 9. 26 7pm 

cast- 최재웅(발라디어/오스왈드), 전재홍(사격장 주인외) 강태을, 한지상, 김대종,김대명, 임문희, 최혁주, 이석, 이창용, 김지숙, 윤성원, 엄예은

 

2009. 9. 29 8pm

cast- 최재웅(발라디어/오스왈드), 최병광(사격장 주인 외) 이하 동일

 

 

2007년 쓰릴미로 배우님의 팬이 되고 난 이후, 이분이 2005년 어쌔신에 나오셨다는 걸 알고 나서 떠올랐던 기억이 있었다. 2005년 당시, 내 친구들 중 두 명이 이 공연을 봤었다. 둘이 같이 본것도 아니고 각자 보았고, 각기 전혀 다른 경로로 내게 이 공연이 무지 좋으니 꼭 가서 보라는 추천을 해줬었다. 호기심에 그러마 했었지만 무슨 이유에서였는지 못보고 넘어갔다. 이후 한시간 짜리 방송용 편집 영상 속에서 발라디어/오스왈드를 연기하신 배우님을 보고 그때 내가 친구들 말 대로 저 공연을 보러갔더라면 어땠을까 생각을 해보곤 했었다. 그리고 그때 보러 갈 것을, 하고 후회한 적도 적지 않았다. 꼭 한번이라도 보고 싶었지만 2005년 어쌔신에 대한 여러 얘기들로 미루어 볼 때 다시 못볼 것이라고 생각했던 어쌔신을 2009년에 다시 보게 되었다. 또한 배우님은 2005년과 동일하게 발라디어/오스왈드 역을 맡으셨다. 그리고 손꼽아 기다리던 첫공. 좋았다. 근사했다. 그리고 낚였다. 그 결과 사흘 만에 다시 보러갔다. 그리고 그 날 공연은 아래에도 썼듯이 첫공 보다도 오히려 무언가 삐걱거리는 공연이었음에도 이 공연 자체에 대한 내 애정도는 줄어들지 않았고 오히려 커졌다.

 

 

이 극은, 발상 자체가 흥미로우며 구조가 놀라우리만큼 잘 짜여져있다. 제목대로, 어쌔신, 즉 암살자들이 주인공인데 이 암살자들이 암살한 것은 다름 아닌 미국 대통령. 미국 대통령을 암살한, 혹은 암살하려했던 아홉명의 암살자들의 이야기는 극 안에서 시간 순서도 무시한채 뒤죽 박죽인 채로 나열된다. 게다가 이 암살자들은 특정 시대에 함께 존재했던 이들이 아니라 미국 역사를 통틀어서 각기 다른 시대, 다른 장소에 존재했던 인물들이다. 그러나 극 안에서 이들은 비교적 친밀하며 기실 일종의 갱(gang)과 같이 묘사되고 있으며 이들의 암살 행위 또한 서로가 서로를 향한 부추김과 회유를 통해 발생하는 것 처럼 진행된다. 그러므로 이 암살자들의 이름과 이들이 겨냥한 대통령의 이름은 역사적 사실이며 이를 둘러싼 배경 또한 상당 부분이 역사적 사실과 일치하나 그러나 이것은 분명 '역사극'은 아니었다. 이들이 실제 암살범의 이름을 사용하고, 그들에게 겨냥된 대통령들이 등장하고, 당시의 실존 인물들이나 역사적 배경들이 아무리 명료하게 사용된다 할지라도 그것들은 실제와는 아주 깊은 관계는 없는 것들이다. 내게 이 극은 분명 대통령의 암살자들을 내세우고 있지만 기실 그 '암살자'들이나 '암살'에 대한 이야기는 아닌 듯 보였다. 그렇기 때문에 (끝에 비록 부스가 언급하기는 해도) 실제로는 서로 날짜의 격차를 두고 포드 대통령을 겨냥한 사라 제인 무어와 리네 스퀴키 프롬이 같이 손잡고 대통령을 저격한 것 처럼 나오는 에피소드도 무리가 없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럼 도대체 왜, 이 극에서는 대통령을 저격한 암살범들의 이야기를 끄집어 낸 것일까? 그러니까 이건 왜 하필 대통령이었냐는 이야기가 된다. 쓰릴미의 네이슨이 심의관들 앞에서 항변 한대로 세상엔 정말이지 더 끔찍한 범죄도 많은데 말이지. 부스가 자랑스레 떠벌린 대로, 대통령을 죽이는 것은 살인이 아닌 '암살'로 불릴 만큼 위대한 범죄라서 인가? 글쎄 부스는 신념은 강하지만 제정신이 아니니 부스의 의견일랑 일단 좀 미뤄두고.

 

 

여기에서 대통령이란 결국 커다란 상징과도 같다고 생각한다. 그건 분명 자유국가. 비크가 뇌까린 대로 모든 것이 가능하다고 지껄여대는 자유국가의 최선봉에 서 있는 상징. '대통령을 쏜다'는 행위는 고로, 찬란한 자유국가의 허상에 대한 비아냥이고 통렬한 저항이다. 무엇이든 가능한 자유국가라 떠들어대지만, 그 자유가 과연 누구를 위한 자유냐는 것이다. 승리한 자의 자유, 가진 자의 자유, 결국 주류 사회 속에 위치한 자들의 자유 일뿐. 그러니 패배한 자, 짓밟힌 자, 가진 것이 없고, 비주류에 처박힌 이들에게 자유국가를 향한 찬송가는 비아냥과 저주의 웃음소리와 같이 들릴 밖에. 그러니 어느 순간 그네들을 외치게 되는 것이다. 모든 것이 가능한 자유국가? 그러면 우리는 대통령을 쏘겠어. 이 자유국가라는 허상에 총부리를 겨누겠어. 그것도 우리의 자유니까. 어쩌면 그것만이 우리에게 허용된 유일한 자유니까. 이 극이 여기서, '암살'이라는 범죄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이 아니므로 이 극이 살인을 옹호하고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이들은 '대통령을 죽였다'라기 보다는 자유국가의 환상을 깨부쉈다 혹은 밝혀냈다라고 보아야할테니 그렇다고 해서 또 이들이 이 극 안에서 무조건 옹호 받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이해가 안가기도 하고 터무니 없기도 하고 기가 차기도 하다. 그러나 이들은 그 자유국가 안에 존재한다. 본인이 미치광이일 수도 있고, 사회에 의해 짓밟혔을 수도 있고, 정당한 경쟁에서 패배했을 수도 있다. 그래도 존재한다. 모든 것이 가능한 자유국가라는 화려한 이름 뒤에. 밝은 면 뒤에 어두운 면으로. 그러나 모든 것이 가능한 자유국가라는 외침은 그 어두운 면들을 더 어두운 곳으로 파묻어버린다. 그것이 과연 정당한가? 비록 그들이 미치광이라고 해도? 그럼 그것이 더 안전하기는 한 걸까? 극은 아니라고 이야기한다. 결국 그렇게 밀려난 이들은 총을 들어 겨냥할 테니까. 그런 의미에서 나는 마지막에 'Something Just Broke'가 대통령의 죽음에 대한 애도라기 보다는, 평온과 평화라 굳게 믿었던 환상이 깨져나가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닌가 그렇게 들었다. 평화라 믿었지만, 평화가 아니야. 모든 것이 자유롭다 믿었지만 이 사회 어딘가에서는 대통령에게 총을 겨눌 마음을 품은 이들이 살고 있었다. 그러니 이들은, 대통령에게 총을 겨누었기 때문에 '암살자'가 아니라 애초에 그 존재 부터가 평화와 자유라는 환상 속에 갇힌 사회를 향한 '암살자'들이다. 이들의 행위 하나 하나를 뜯어보면, 다들 정신병자, 미치광이, 사회 부적응아, 혹은 발라디어의 일갈 대로 멍청한 놈이라고 볼 수도 있겠으나 한데 모아놓고 보면 자유국가라는 허울 좋은 허상 아래 자리잡은 이들의 뚜렷한 존재감을 외면하고 그저 미치광이라 낙인 찍어 개별의 문제로 취급하려 했던 우리의 이기심을 암살자들의 얼굴 위에서 보게 된다.

 

 

이렇게 볼때, 해설자 발라디어는 다름 아닌 우린 자신. 발라디어는 내내 신나게 비웃는다. 부스에 대해서는 신랄하게 비판하고, 촐고즈의 일화를 매우 명랑하게 전달하며, 귀토에 대해서는 명백한 조롱으로 일관한다. 그는 그네들을 미치광이, 멍청한 놈으로 부르고 폭력으로는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으며 그네들의 헛짓거리를 비웃고자 한다. 그러나 결국 발라디어는 암살자들에게 밀려나고 만다. 그들의 행위 하나 하나는 비웃을 수 있으나, 한데 모인 그들, 암살자의 존재, 그 명확한 존재감 마저 부정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그렇게 발라디어가 다시 오스왈드의 모습으로 나타났을 때, 냉소적인 그 얼굴이 공포 혹은 직시하기 싫은 현실로 인해 위축되었다가 끝내 미소를 지으며 총을 움켜잡았을 때, 어쩌면 우리는 알게되는지 모른다. 뭔가 깨졌다는 것을. 그렇지. 그들도 행복해질 권리가 있다. 단 한 명이었을 때는 돌연 변이라 취급할 수 있으나, 한명이 두명이 되고, 두명이 세명이 되면..아니지 사실 한명 뿐이라고 해도, 우리가 아무것도 노력하지 않고 고민도 없이 간편하다는 이유만으로 버리는 것이 용납이 되는 걸까. 생각해봐야 할 문제다. 또 발라디어가 오스왈드가 되고, 암살자들이 평범한 사람들이 되고, 다시 암살자가 되는 과정 속에서 내 자신의 위치가 현재는 어디인지, 그리고 그것이 언제까지 유지가 될런지 생각해보지 않을 수도 없었다. 그래서 나는 이 극을 보기 위해 미국에 대한 역사나 정치에 관한 심도 깊은 공부가 필요하다고는 보지 않는다. 물론 이 극은 아주 미국적인 극이지만, 또한 그 주제의식 자체는 개별적인 것이 아닌 보편적인 것으로 문제 없이 치환이 가능하다. 그래서 미국은 극에 등장하는 링컨을 비롯한 모든 대통령이 실제 대통령이지만 실제랑은 별 상관없는 인물이었던 것 처럼, 마찬가지로 그저 현대의 자본주의, 자유주의, 민주주의 국가 혹은 사회와도 크게 다르지 않는 무언가라고 생각한다. 이것이 정말 미국적인 극이었다면, 그렇게 한정된 주제의식과 개별화된 에피소드를 다룬 극이었다면 이 극을 여기에서 올릴 이유도 필요도 없을 것이다. 귀토가, 여긴 폴란드가 아니라고 미국이야, 라고 얘기할 때도 관객은 이미 알고 있으니까. 여기가 미국이 아니라는 걸. 그러나 그 미국이 실제 미국과는 상관없는 상징이 될 때, 귀토의 말은 우리가 앉아 있는 현실과도 부합하는 것이 된다.

 

 

음악적인 면에서 올해의 어쌔신은 반주가 오로지 피아노 두 대만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는 장단점이 모두 있는 선택이라는 생각이 든다. 손드하임의 음악이란 (잘은 모르긴 해도) 잘 어울리지 않는 음들을 부조화 속에 조화로 녹여내는 탁월한 솜씨로 정평이 나있는 것인데, 분명 피아노 두대로 연주하다보니 그러한 특유의 맛은 좀 더 매끄러운 음악 속으로 사라진 측면이 분명 있다. 또, 지금까지 내가 피아노 반주만으로 이뤄진 극을 세 편을 봤는데 쓰릴미는 두 사람, 후의 경우는 세 사람만이 등장하는 극이다. 반면 이 극은 무려 열 두명이 등장한다. 그 합창에 피아노 반주가 아무리 두 대라도 버겁다라는 인상을 받을 때도 있긴 했다. 그래도 소극장임에도 라이브로 듣는 연주의 매력, 또 아주 순전히 개인적인 취향이긴 하지만 피아노 소리를 좋아하는 나로써는 피아노 두대가 직조하는 소리에서 느껴지는 아름다움에도 제법 만족 했고, 두 개의 피아노 선율이 서로 교차되면서 가능한 범위 안에서 손드하임의 음악적인 묘미를 살리려고 최대한 노력을 했던 것으로 보여 나쁘지 않은 점수를 주고 싶다.

 

 

공연 초반인걸 감안하면, 배우분들의 노래 실력이나 연기는 대체로 만족스러웠는데, 부스와 장가라는 확실히 아쉽다. 덧붙여 프롬도. 부스는 이 갱의 리더로 애초에 시작부터 명시되는데 리더다운 면모가 아직은 나타나고 있지 않다. The Ballad of Booth에서도 보다 확신에 차야할 텐데, 부스는 누구에게 떠밀린 것도 아니라 자신의 신념으로 선택한 일이 아니던가? 발라디어는 신념과 의지는 강했다고 노래 하고 있고. 그런데 강태을씨의 부스에서는 전혀 그런 점이 느껴지지 않았다. 촐고즈와의 장면이나 오스왈드에 대한 회유 씬에서도 부스는 명확한 태도를 견지하지 못하고 흐릿한 존재감에 머물고 만다. 부스가 강해져야만 극의 긴장감은 더 팽팽해질 것이고 극적 재미 또한 더해질 수 있을 것이다. 장가라의 이창용씨도 아주 노골적으로 이 암살자들의 위치를 보여주는 씬이었는데도 불구하고 앙상블의 떼창에 묻혀버려 정말 스스로 그 장면의 주인공이기를 포기하는 듯 했다. 26일 공연에서는 세트 위에 있었고, 29일 공연에서는 세트 밑으로 내려왔는데 위에 있으나 밑에 있으나 존재감이 미미하기는 마찬가지였으니. 공연이 거듭하면 좀 나아지려나? 프롬의 경우도 그랬다. 종종 미스김이신가요? 싶었으니. 살인마 찰스 맨슨에 대한 맹목적인 추종과 사랑을 보내는 프롬 치고는 너무 얌전한, 그저 사랑에 빠진 소녀같다. 그래서 다방 레지로 생애 처음 본 서울대 나온 남자를 사랑해서 그 무뚝뚝한 남자에게 사랑을 고백하는 미스김과 너무 유사해 보였다. 허나 프롬은 그런 캐릭터는 아닌 것 같다. 그녀가 찰스 맨슨에게 사로잡힌 것, 그 맹목적인 사랑, 절망과 좌절으로 인한 파괴와 일탈에 대한 사랑 그 자체가 이 극의 전체 주제의식의 하나로 구성하기 때문에 프롬은 좀 더 강팔라져야하고 좀더 광기 어려야 하고, 좀 더 되바라져야만 한다. 김대종 씨 귀토에는 브라보를. 그 능청스러운 연기라니. 두번 보고 와서는 귀토 장면에 푹 빠져서 요즘 그 곡만 듣고 다닌다. (물론, 70%의 이유는 그분 때문이긴 해도) 엠마 골드만 역의 김지숙씨도 정말 좋았다. 마지막에 뭔가 깨졌어, 할때 그 노래의 분위기를 그렇게 자아낼 줄은 상상도 못했다. 사격장 주인은 더블 모두를 보았는데, 최병광씨 역시도 연기 노래 모두 흠잡을 데가 없다 싶었지만 재홍씨의 능글맞음이 내게는 더 어울려 보였다. 특히 오프닝에서 사격장 주인이 기묘하게 암살자들을 꾈 때, 어딘지 악의적이고 장난기 어려보이는 재홍씨의 얼굴이 좀 더 인상적이었던 듯 하다.

 

 

그리고 배우님은. 노래하는 배우님은 정말이지 내게 치명적이다. 발라디어의 방관자적인 여유로움과 조롱기가 한껏 어린 몸짓과 표정, 쾌할한 비아냥과 명랑한 노래에 그저 반할 수 밖에 없었고 암살자들의 항의에 밀려나던 순간 시시각각 변하던 표정, 그리고 오스왈드로 변해 나타났을 때 얼굴에 새겨지던 그림자의 깊이란. 그리고 총을 잡던 순간의 웃음. 이분의 연기를 가만히 지켜보고 있자면 가슴이 서늘해지는 순간들을 종종 경험하게 된다. 29일 공연 때는, 그 때였다. 신나게 암살자들을 비웃으며 꾸짖어대던 비판자요, 해설자요, 방관자이며, 구경꾼이었던 발라디어가 암살자로서 총을 잡던 그 순간. 왜 발라디어가 오스왈드가 되었는지를 이해했고, 그래서 등골이 서늘했다. 젠장. 어쩌면 사실 그들은 행복해질 권리 따위 박탈하는 것이 마땅한 인물들인지도 몰라. 허나, 그들이 행복해질 권리가 있다는 사실 자체를 망각하거나 외면하는 것이 온당한가. 그렇게 내려지는 결정과 처벌은 합당한 것인가? 모두에게 이로운가? 아니면 최소한 다수에게라도 이로운가? 그들을 품고 사는 혹은 만들어냈을 사회 속에서 사는 우리는 정말 괜찮은 것일까? 숱한 질문들이 떠돌았고, 그래서 오스왈드 씬에 뒤이어 뭔가 깨졌다고 노래 할때 가슴이 먹먹했다. 아 그래, 뭔가...깨졌어.

 

 

이올린에 북마크하기(0) 이올린에 추천하기(0)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
Creative Commons License
Posted by 제이(J)
이전버튼 1 이전버튼